화랑본국검18반

국선 화랑 本 國 劍의 역사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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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선 화랑本國劍의 정의

 

 


 1. 나라의 국검(國劒), 화랑본국검(화랑本國劍)의 정의

 

본국검은 삼국시대에 고구려, 신라, 백제의 무사집단인 화랑도」 「조의선인」 「무사도등을 중심으로 무술 연마를 위하여 사용한 우리 고유의 민족무예이다. 고려시대에는 북반무사와 남반무사가 양립하여 고구려의 무예와 신라, 백제의 무예가 양존하여 오다가, 조선 정조 때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가 편찬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1790년 정조>에 본국검으로 수록 되었으며, 조선중기이후 보군의 무과시험으로 채택되어 병법으로 활용되어온 한민족의 전통무예이다.

 

그 후 일제시대 사학자 안자산 선생이 편찬한 조선무사영웅전(朝鮮武士英雄傳, 1919)의 기록에 이것은 조선 임진란 당시부터 격검법이 크게 발달하여 고법(古法)을 더 연구한 것도 있고, 타방(他邦)의 법을 취하여 새로이 첨가(添加)함도 있어 그 기법의 종류를 모두 십일문(十一門)으로 정()한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본문(本國劍門)에서는 (1)권법(拳法), (2)예도28(銳刀28). (3)장도(長刀), (4)에도총도(銳刀總刀), (5)교전(交戰), (6)제독검(提督劍), (7)본국검법(本國劍法), (8)쌍검(雙劍), (9)월도(月刀), (10)협도(狹刀), (11)곤방(棍棒), (12)검무 등 총 12(十二門)을 본국검의 수련과목으로 정하여 현재까지 전수되고 있다.




2. 본국검무(劍舞)의 유래에 대하여


 ※ 소도(蘇塗, 수두)와 국자랑(國子郞)
고조선시대에 발생한 소도蘇塗라고 하는 것은 제천단을 모셔놓고 민속적 의식을 치르는 일 뿐만 아니라 젊은 화랑들이 모여서 학문을 배우고 육기(六技)를 익혔으며 무리를 지어 술 마시며 노래하며 춤을 추어 서로 단합을 도모했던 하나의 집회장소이다.
이 소도의 행사의 주체는 화랑이었고 천부경, 삼일신고를 공부했다. 또 소도행사의 우두머리는 국선(國仙)이 담당했다. 항상 소도 옆에는 '솟대'라고 하여 나무를 높이 세워 그 위에 새를 조각하여 얹어놓고 재액을 물리치고 복을 빌었다.
태백일사삼신오제본기(조선중기 이맥李陌(1455~1528)편찬)에 보면, 소도가 서면 언제나 계戒가 있는데 그것은 충, 효, 신, 인, 용의 오상지도(五常之道)이니라. 소도의 옆에는 언제나 경당을 세우고 미혼의 자제들에게 사물을 상습케 했는데, 그것은 글을 읽고, 검술(본국검)을 하고, 활을 쏘며, 말을 타고, 예절을 익히며, 무용과 노래를 부르고, 주먹치기(수박) 등의 여섯 가지의 기예를 말한다.
위의 내용을 보면 소도에는 언제나 오상지도가 있다고 했는데 삼국시대의 화랑제도와 다를 것이 없다. 고구려 신라, 백제에도 이러한 화랑제도가 세습되어 전승되어 졌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화랑제도를 풍월도, 국선도, 풍류도등으로 칭하면서 한편으로는 무사도의 상징이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민족종교적 사상화하여 무속신앙으로 발전하였다. 오늘날 한민족의 민족종교는 이러한 민족역사와 사상과 이념을 근본바탕으로 삼고 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말하기를, “사대주의파 사상과 언론이 조선을 지나화하려는 판에 이에 반향 배척하여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온 것이 화랑제도이었다.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를 말하려 함은 골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음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 신라 황창의 검무

<동경잡기(東京雜記)1669 현종10년 민주면, 이채 편집>, 동국여지승람 1530년 조선 중종 25 풍속도에 의하면, 황창랑(黃倡郞)이라는 신라 소년이 백제왕 앞에서 검무(劍舞)를 추다가 왕을 찌르고, 자신은 백제인들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는데, 신라 사람은 이를 슬퍼하여 황창랑의 모습을 그린 가면을 쓰고 검무를 추는 풍속이 지금도 전해 온다고 하였다,

 

<무예도보통지>에는 황창랑의 검술로부터 본국검의 술법은 실전(失傳)되어 오래도록 전하지 않다가, 중국의 모원의(暮元義)가 조선의 옛 검법인 <조선세법(朝鮮勢法)>을 우리나라에서 찾아 <무비지(武備志)>에 채록함으로써 <무예도보통지>에도 그 검보(劍譜)를 수록하게 된 것이다. 이 본국검은 <무예도보통지>에 수록 되기 이전에 영조 때 사도세자가 편찬한 무예신보(1759(영조35)본국검으로 기록되어 있고,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의 판옥선에서 왜적과 대적할 때 사용한 흔적이 일본 종군화가가 그린 그림이 도꼬 한 겔러리에서 발견되었다.


옛날에는 검()과 도()를 구별하여 양쪽에 날이 있는 것을 검이라고 하고, 한쪽에만 날이 있는 것은 도라고 하였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 검과 도를 혼용하게 되어 보통 칼이라 하면 도검(刀劍)을 총칭하였다. 본국검은 허리에 차는 칼인 요도(腰刀)로 하는 검술이다. 요도의 무게는 18량으로 약 1kg이며, 이 칼을 가지고 검무를 출 때에는 한 손으로 자루를 잡고 휘두르기도 하지만 실전(實戰)에서는 자루를 두 손으로 꼭 잡고 쓰게 된다. <무예도보통지>의 본국검 자세가 모두 칼을 두 손으로 잡고 있는 그림으로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검법은 안법(眼法), 즉 시선을 쓰는 법을 우선 배우고, 칼로 치는 격법(擊法), 칼로 베는 세법(洗法), 칼로 찌르는 자법(刺法)을 익혀야 한다. 본국검은 동작이 32세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중에 안법 6, 격법 5, 세법 4, 자법 7수 등의 32수와 이밖에 지검대적세(持劍對賊勢) 같은 기본자세 및 내략(內掠), 외략(外掠)같은 방어법이 들어 있다.


<무예도보통지>의 본국검 검보와 총도(總圖)에는 검법의 운용을 순서에 따라 자세를 그려 놓았으나 세법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결여되어 있어서 실제로 그 전체의 묘()를 터득하기가 어렵다. 이것은 모원의가 조선에서 입수했다는 조선세법을 그대로 <무예도보통지>에 옮겨 놓은 때문이다. 또한, 편찬자가 본국검법에 관하여 조예가 깊지 못하였다는 데도 원인이 있다. 그러므로 모원의가 그 검보를 어떻게 누구에게서 얻었는지, 그리고 과연 신라 화랑이 사용하던 검술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할 당시와 모원의 세대는 백년 이상이 지났으므로 편찬실무자로서도 <무비지>의 조선세법 검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무비지>의 조선세법이 유일하게 정해진 우리나라 검법으로서 <무예도보통지>에도 본국검으로 수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것은 조선이 스스로 본국의 보를 창안한 것이라고 밝혔으니 우리 특유의 검술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신라는 왜국에 이웃하고 있어서 신라의 검기(劍器)와 검무가 왜국에도 반드시 전하여졌을 것이나 고증할 수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본국검의 금계독립세와 왜검(倭劍)의 토유류(土由流) 장검우협세(藏劍右狹勢)는 동작이 비슷할 뿐 아니라 왜검보의 자세들이 본국검법에 있는 자세를 단순화하거나 변화를 가한 모양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이 본국검은 조선 중기 이후 보군의 관무재초시(觀武材初試) 시험과목으로 시행되어 전투에 실용되는 검술로 실시되었다. 고종 때는 군제(軍制)를 개혁하여 1896(고종33)에 경무청에서 경찰훈련과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군사훈련 과목에 검술(격검)과목이 채택되어 교육을 실시하였으나, 이후 조선은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의 주권을 잃으므로 해서 일본은 우리의 정신과 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식의 검도를 조선학도들에게 강제교육을 시켰으며, 일인교사들은 닛본도(日本刀)를 차고 강의를 하였다.


1907년에 일제가 대한제국의 침략이 보다 쉽게 이루어지도록 하기위해 국방의 의무를 맡고 있던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킴에 따라 우리의 전통기예인 격검 교육을 받은 군사들은 항일의병이 되어 대일항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됨으로서 민족화랑무사도의 주체인 본국검은 개별적 호신무술로 사용되어오다가 가전무예(家傳武藝)나 민속검무(民俗劍舞등의 형태로 맥을 이어오고 있는 한민족의 고유한 문화유산이다.

 

     《참고문헌》 무예도보통지무비지 (모원의), 도검록동경잡기대전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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