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상무예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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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무예의 역사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에 전하는 5~6세기의 고구려 고분에는 수렵도(狩獵圖)가 그려져 있습니다. 무용총에 있는 수렵도는 산악 지대에서 4명의 말을 탄 무사가 활을 쏘며 사냥하는 모습입니다. 말을 탄 무사가 호랑이를 쫒아 가면서 전방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으며, 다른 장면은 말 위에서 상체를 뒤로 돌린 무사가 활시위를 당기면서 좌사 하는 방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모습은 오른손에 활을 잡고 왼손으로 화살을 시위에 걸어 180˚뒤를 향한 자세로 우 후방에 있는 사슴을 향해 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쌍영총(雙楹塚)에도 마상 궁술(馬上 弓術)인 기사(騎射)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마치「무예도보통지」에 나오는 기사(騎射)와 유사한 모습입니다. 마상 궁술인 기사(騎射)뿐 아니라 마상 장창을 이용한 기창(騎槍)도 고구려 고분에 나타납니다. 삼실총 고분에는 2인의 기수가 말을 타고 매우 긴 창으로 교전을 하는 벽화가 있고 안악 3호분의 대 행렬도와 쌍용총의 고분 벽화에는 왼손에 장창을 쥔 기수가 행렬을 따라가는 모습도 보입니다. 따라서 고구려에는 기창(騎槍)이 주요 무예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와서 기사(騎射)는 무예로서 중시하였습니다. 기사는 무과 초시 및 복시에 부과하는 무예로서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목표물을 맞히면 1발에 5점을 부여하였습니다. 한편 조선 태조 이성계는 마상 궁술인 기사(騎射)뿐만 아니라, 마상재에도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1362년 7월에 이성계가 원나라 군대와 싸울 때 적장이 찌르는 창을 몸을 숨기는 동작으로 피하였다는 점에서 고려 때는 마상 무예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 위에서 부리는 각종 곡예인 마상재(馬上才)가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것 역시 격구와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의 무예의 일종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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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 무예가 체계화 된 것은 1790년(정조 14년)에 이덕무(李德懋)와 박제가(朴齊家)가 무관(武官)인 백동수(白東修)의 도움을 받아 펴낸 「무예도보통지 武藝圖譜通志」에 의합니다. 여기에 기창(騎槍), 마상쌍검(馬上雙劍), 마상월도(馬上月刀), 마상편곤(馬上鞭棍) 4기와 격구 마상재(馬上才) 2기 등 마상 무예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때에 말을 타고 이루어지는 마상 무예가 체계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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