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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에였다-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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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황실 계보도 -
[인터뷰: 한국 명지대 사학과 김위현 교수]
지금의 새로운 주장이 아니고 이미 900여년 전에 정사에 나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한반도에서 넘어갔다는 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주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와서 이다 아니다 이런 논란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북만주에서 바람처럼 일어나 중국 대륙을 제패했던 여진의 영웅 아골타,
그의 선조는 고려초에 한반도에서 넘어간 사람이었다.
천 년 넘는 역사의 저편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거짓말 같은 이야기지만 엄연히 중국 정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내용은 앞서 본 송막기문, 금사, 흠정만류원류고 뿐만 아니라
금지, 선화유사, 삼조북맹회록 등에도 줄줄이 기록되어 있다.
이민족으론 처음으로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 한족 황제를 포로로 잡았던 여진족,
그들의 선조는 한반도로부터 왔고 그들의 성씨는 김씨였다. 어떠한가?
갈수록 흥미진진해 지는데,
금태조 아골타의 선조의 의문의 사나이 김함보, 그는 과연 누구일까?
신라의 왕릉은 모두 신라 수도였던 경주에 있다.
유일하게 신라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김부 金傅)의 무덤만이 경기도 연천에 있다.
왜 신라 왕릉이 경기도에 있을까?
후삼국 말기 고려의 압박에 경순왕은 신라 천 년 사직을 고려에 넘기기로 한다.
그러나 마의태자(麻衣太子, 김일(金鎰))는
천 년 사직을 고려에 넘기는 것에 대해 결사반대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 9년 -'왕자는 울면서 하직하고 떠나
곧바로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삼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라는 대목이 있다.
그렇게 신라 천 년 사직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엔 특이한 지명이 있다.
다물. 다물은 빼앗긴 나라의 광복을 뜻한다.
이곳 강원도에 무슨 나라가 있었다는 것일까?
그런데 금강산에서 쓸쓸하게 죽었다는 마의태자의 행적에
의문을 품게하는 유적들이 이곳 인제에 있다.
마의태자유적지비. 왜 마의태자 유적비가 여기에 있을까?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에는 수백년 된 대왕각이란 사당이 있다.
매년 김부리 사람들은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대왕각엔 마의태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인제 인근에 남아있는 마의태자 관련 유적은 나라가 망한 후에도
신라인들이 고려에 저항했음을 보여준다.
[인터뷰: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성수 교수]
천년이나 되는 신라가 아무 저항 없이
망했다고 하는 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신라의 화랑들이 그대로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의태자가 반대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반대해 가지고
신라의 저항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강원도 인제 유적들이 있죠.
고려에 항전하던 일단의 반 고려 세력들,
그들과 금나라 황실의 시조가 된 김함보는 어떤 관계일까?
고려사에는 금의 시조에 대한 구체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고려사》예종 10년,
'평주의 승려인 금준이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금나라의 선조가 되었다.
혹자는 평주 승려 김행(金幸)의 아들 극수가 금의 선조라고도 한다
(我平州僧今俊....金之先 或曰 平州僧金幸之子克守....)' 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고려사》에 나오는 김행과 같은 이름이 등장하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1636년 조선 유학자 김세렴이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오면서 남긴
《해사록》이라는 책엔 놀라운 기록이 나온다.
신라 고도 경주에 들린 감회를 쓴 대목이다.
《해사록》
' ....(경순왕) 김부가 려왕(고려왕)에 항복한 후
그 외손 완안 아골타 즉, 권행의 후손....' 라는 기록이 있다.
즉,완안 아골타는 경순왕의 외손이며
안동 권씨 시조인 권행의 후손이라 했다.
아골타의 선조 함보는 김씨(金幸)인데 왜 권행(權幸)의 후손이라 했을까?
서기 930년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은 안동 병산에서 대혈투를 벌인다.
이때 안동의 김행과 김선평 장장필 세사람이
왕건을 도움으로써 고려군은 대승을 거둘수 있었다.
경북 안동시 북문동에는 삼태사의 묘가 있다.
왕건은 위 세사람에게 태사(太師)의 직위를 내리고 김행에겐 권씨를 하사했다.
이로써 김행(金幸)은 안동 권씨 시조인 태사공 권행(權幸)이 되었던 것이다.
고려사에 나오는 김행이 안동의 김행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권행은 본래 경주 김씨였다.
그런데 태사라는 최고의 직위를 받은 태사 권행과 그의 후손들은
이후 100년 넘게 고려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
[인터뷰: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성수 교수]
신라에 충성했던 김행이 후백제의 공격을 막은 것은 어디까지나
신라를 위해 싸운 것이지 왕건을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석해야만 그가 왕건의 벼슬을 하지 않은 것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김함보가 누구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그는 김씨 출신의 신라 광복군으로 추정되며
그가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선조임은 명확해졌다.
[인터뷰: 한국 명지대 사학과 김위현 교수]
김함보는 신라 왕족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신라가 망하고 김함보를 중심으로한 일단의 반고려 세력들이 동해안을 거쳐서
두만강을 건너 여진지역에 옮겨간 것으로 추론이 됩니다.
격동의 시기 망국의 한을 품고 북으로 올라간 김함보와 그의 무리들,
그들에겐 새로운 땅 드넓은 만주벌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라인 김함보의 후손들이 만주를 통일하고 나아가 한족의 본거지인 중국대륙을 장악했다.
' 북방민족인 만주에 중국이 흡수된 형국이다.
우리역사에서 여진족은
읍루, 말갈, 물길, 숙신, 주신, 여직, 여진 그리고 만주족으로 등장한다.
부여와 고구려 발해의 주요한 구성원들이었고
우리 역사의 한 축을 이루던 사람들이 바로 여진족이다.
금사에 따르면 김함보가 여진족의 땅으로 들어갈 당시
여진의 각 부족 사이에선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우마변상법이라고 하는 일종의 성문법을 제정하고
각 부족으로부터 합의를 이끌어 냄으로써 그 지도력을 인정받게 된다.
이 이후 그의 후손들은 완안 여진 뿐만 아니라 전체 여진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그의 7세손에 이르러서는 영토가 간도에까지 확대 된다.
그리고 1102년에 고려로 사신을 보낸다.
그런데 아골타가 여진족의 지도자가 되기 직전 고려와 대충돌이 일어난다.
1107년(고려 예종 2년) 12월 윤관 장군이 지휘하는 고려의 17만명은 여진을 정벌에 나선다.
고려군의 상대는 김함보의 후손들이었다. 김함보가 여진족의 지도자가 된 후
150여 년 후 팽창하던 여진족은 함경도 인근에서 고려와 잦은 충돌을 벌인다.
북관유적도(北關遺蹟圖)에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비석을 세우는 그림이 보인다.
이 그림은 윤관이 북관지역의 여진을 정벌하고 국경비를 세우는 장면(拓境立碑圖 척경입비도)이다.
윤관 장군은 이 전쟁에서 동북9성을 확보하고 최북단인 공험진(公?鎭)에 국경비를 세웠다.
고려의 북쪽 국경선인 공험진은 어디었을까?
일제 강점기때부터 공험진의 함경남도 일대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윤관이 국경비를 세운 공험진은
함경도 종성에서 북으로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다.
조선국회도. 세종때 실측한 이 지도를 보더라도 공험진은
함경북도 종성의 북쪽이고 두만강 너머에 있던 것이 명확해진다.
공험진비는 길림성(吉林省 지린성) 연길시(延吉市 옌지시) 부근에서 발
견되었다는 기록만 전해져 올 뿐 행방은 알 수 없다.
조선국회도와 북관유적도 등을 종합해 볼 때 공험진은 연길시 부근으로 추정된다.
여진은 자신들의 주요 근거지의 하나였던 간도지방을 고려에 뺏긴 것이다.
다급해진 여진은 고려에 동북 9성을 돌려달라는 서신을 보낸다.
당시 여진 추장은 아골타(阿骨打)의 형 오아속(烏雅束)이었다.
《고려사》예종 4년, '일찍이 저희 여진의 선조가 대방(고려)로부터 나왔으니...
이 오아속 역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我祖宗出自大邦至…雅束亦以大邦爲父母之國)...
옛 땅을 돌려주시면 기왓장 한 장 던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여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115년 금황제가 된 아골타도 여진과 고려는 형제지간이고
역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했다. 《고려사》예종 12년,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겨 조심스럽게 섬겨왔고…
(高麗爲父母之邦 小心事之)'라는 서신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금나라에게 고려는 선조들이 나온 부모의 나라였던 것이다.
[인터뷰: 중국 요녕성 대연(다렌) 대학 왕우량 교수]
"동일한 언어, 동일한 지역, 동일한 문화가 있습니다.
이 각도에서 보면 고려와 여진 사이의 전쟁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을 겁니다.
물론 전쟁이 아주 없었다고는 말 할 수 없습니다만 그들은 거란이나 몽고와 다릅니다.
거란과 몽고는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민족 공동체입니다.
그들에게는 혈연상, 역사상의 유대관계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여진인과 조선반도의 신라인 나중의 고려인은 민족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금나라 5경중 하나인 동경성이 있었던 요양,
이곳에서 1985년 우연히 한 점의 비가 발견되었다.
동경 승엄사 선사 탑명(塔銘). 비명은 덕망 높은 한 스님의 일대기였다.
비가 제작된 것은 1190년(명창원년), 스님의 성은 고(高)씨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인공이 동경 요양현 발해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190년이면 발해가 망한지 무려 260년이 지난 시점인데 아직도 발해인이다.
여진과 발해는 어떤 사이였을까?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건국했던 발해는 926년 거란족의 요나라에게 멸망했고
발해인은 집단으로 거란의 동경과 상경 등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300만 발해인들은 끈질긴 광복운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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