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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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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과 발해는 어떤 사이였을까?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건국했던 발해는 926년 거란족의 요나라에게 멸망했고
발해인은 집단으로 거란의 동경과 상경 등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300만 발해인들은 끈질긴 광복운동을 벌였다.
거란의 수도 인근에서 발생한 발해인의 반란이 2년 동안이나 지속되기도 했다.
발해인과 여진족 사이엔 반거란이란 연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금사》 여진발해동본일가(女眞渤海同本一家).
여진인과 발해인은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같은 뿌리 한 집안이다).
아골타는 거란에 맞서 봉기할 때 여진인과 발해인는 고구려와 발해의 후예로
한 집안임을 주장해 발해 유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다.
[인터뷰: 한국 명지대 사학과 김위현 교수]
발해 여진 동일가라는 그런 말이 먹혀들어갔다는 것은
이미 여진과 발해 사람들 사이에서는 우리는 민족적으로 친연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게 쉽게 먹어들어갔다 이런 얘기인 것입니다.
중국의 수도 북경(베이징),
북경은 송나라 때까지만 해도 한족에겐 변방에 불과했다.
여진족은 중원을 장악한 후 이곳에 대규모 신도시를 만들었다.
북경은 이후 중국의 중심지가 됐다.
요금 성곽 박물관.
이 박물관의 지하엔 금나라 때 건설한 대규모 수로 시설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인공으로 수로를 파서 물길을 연결한 것이다.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나무로 수문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북경의 명소인 북해공원도 이때 완성된 인공 정원이다.
당시 북경 건설의 총책임자는 장호였다.
그는 뛰어난 능력으로 4대에 걸쳐 황제의 신임을 받았던 요양 출신 발해 유민이었다.
《금사》 장호는 요양의 발해인이다.
본래 성은 고씨로 동명왕의 후손이다. (張浩遼陽渤海人本性高氏東明王之後)
장호 뿐 아니라 수 많은 발해인들이 금나라의 고위 관료층을 형성했다.
대제국을 운영했던 발해인들에 대한 금나라의 신뢰는 단순히 혈연적인 친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터뷰: 이성호, 동양사학회/금사 연구]
발해는 대제국을 건설 운영해 본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금이 건국을 하고 국가체제를 확장, 반석 위에 올려 놓는데
그들의 경험이 상당히 필요했을 것이고 따라서 금은 이러한 발해인들을 중용해서
국가건설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활용했던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
요양을 금나라 5대 도시였기 때문에 수 많은 금나라 시대의 금석문이 남아 있다.
그것은 여진족과 발해인의 친연관계 뿐 아니라
대제국을 경영하였던 발해사람들의 경험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요양 박물관 별관에 늘어선 금대의 비들 속엔 특별한 비가 한 점 있다.
통혜원명대사 탑명으로 불리우는 이 비의 주인공은 관찰사 이후의 딸로 역시 발해인이었다.
남편은 아골타의 셋째 아들인 허왕이다.
《통혜원명대사 탑명》관찰사 이후의 따님이시며
태조황제 셋째 아들 허왕의 아내이고 동경유수 정국공의 어머니다.
그녀의 아들 정국공은 나중에 금황제가 되는데 이가 바로
금의 성군이라 불리우는 세종황제였다.
4대 황제 혜릉왕의 어머니 또한 발해인 대씨였다.
금나라 건국 후 많은 발해의 여인들은 금황실로 시집을 갔다.
이로써 발해인들은 금나라의 고위관료층과 왕비족으로 자리 잡았다.
금나라는 발해인과 여진족의 연합정권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인터뷰: 한국 명지대 사학과 김위현 교수]
따라서 금나라는 발해의 후손의 왕비족과 신라의 후예인 왕족
이들이 합해져 금나라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낳았다.
따라는 금나라는 우리 역사의 한 자리매김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다.
금황실의 선조가 신라 출신이었고 국가의 지배층은 발해유민,
그리고 고려와의 우호적 관계, 여진족 금나라는 우리 역사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만주의 역사는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발해
그리고 신라의 후예와 발해 유민이 세운 금나라의 역사가 되는데
이는 중국의 역사와는 상충되고 우리의 역사와는 그 맥락이 이어진다.
이렇게 만주와 중국대륙을 지배하던 금나라는 또다른 북방민족인
몽골족의 원나라에 중원을 내주고 만주로 후퇴한다.
북방민족인 금나라와 원나라의 300년 지배를 받았던 중국 한족이
1368년 명나라를 건국해서 중국대륙을 지배함으로써 한족의 자부심을 회복하는듯 하다.
하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여진족이 1616년 만주에 후금을 세우고
중국을 공략해 명나라를 무너뜨림으로써 다시 중국 대륙을 지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중국을 마지막으로 지배한 청나라이다.
제작진은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과 관련된 뜻밖의 사람을 북경에서 만날 수 있었다.
북경 농업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그녀는 자신을 청 건륭황제의 7대손이라고 소개했다.
집안엔 증조부의 사진을 비롯해 건륭황제의
아들과 손자 등 그 후손들의 글씨 등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여진족의 후예들이 세운 중국을 마지막으로 지배한 왕조 청나라
제6대 황제 건륭제는 60여년 동안이나 재위한 황제로 유명하다.
건륭제는 티벳(Tibet)과 신장 위구르(Uighur) 지역까지 장악했다.
지금의 중국 영역은 청 건륭황제가 이룬 것이다.
중국 한족의 나라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만주족이 세운 청황실의 성은 아이신줘러다.
그런데 7대손인 그녀는 자신의 성이 김(金)씨라고 했다. 그녀의 이름은 김괄(金适)이었다.
[인터뷰: 김괄, 청 건륭제 7대손]
제 할아버지 성함은 헝쉬입니다. 아이신 줘러 헝쉬요. 헝 항렬입니다.
그는 당시에 직업을 구하거나 학교를 다닐 때 김광평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김계종이고 우리는 그걸 따랐습니다.
저는 김씨입니다.
누루하치는 1616년 만주에서 후금을 건국한 후 랴오녕성 심양을 수도로 정한다.
이곳 심양 광장엔 청태조 누루하치부터 마지막 황제 선통제 부의(푸이)까지
역대 청조황제 열 두 사람의 좌상이 놓여 있다.
청태조의 이름은 애신각라 노이합적(愛新覺羅 努爾哈赤) 즉 아이신줘러 누루하치.
청황실의 성은 한자로 애신각라(愛新覺羅)다.
그런데 왜 청황실의 후손인 김괄 교수는 자신의 성을 김(金)씨로 알까?
청나라의 역사서인 《만주실록》엔 청황실과 만주족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나온다.
자신들은 하늘의 불고륜의 후손들이며 성은 애신 즉 만주어로 아이신(金)이라는 것이다.
아이신을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애신이 ?고 만주어 아이신의 원래 뜻은 금(金)이다.
(佛庫倫所生 性 愛新, 漢語 金). 각라는 만주어 줘러를 한자로 차음표기한 것이다.
줘러의 뜻은 성, 씨족 등과 같고 성씨에 붙는다(覺羅姓也).
[인터뷰: 김괄(金适), 청 건륭제 7대손]
황족 안에서 우리 성은 아이신 줘러(애신각라)입니다.
아이신 줘러(애신각라)는 만주어이고 한어로 바꾸면 금이 됩니다.
청황실의 성 애신각라 즉 아이신줘러는 금부족들, 김씨들 또는 김씨집안을 뜻한다.
금을 성으로 삼는 여진족의 후예 만주족들, 아이신 줘러 푸이는 김부의다.
금궤도(金櫃圖). 경주 김(금)씨 시조인 김(금)알지의 탄생 설화를 보자.
《삼국사기》 탈해 이사금 9년- 숲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금궤짝이 매달린 나무 밑에 흰 닭이 울고 있었다.
금궤 속에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이름을 알지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성을 금(김)씨로 하였다.
신라 왕성인 경주 금(김)씨와 신라인의 후예 금황실,
그 금나라의 후신인 청황실, 그들은 금을 뜻하는 김씨들이었다.
1911년 신해혁명과 함께 청나라는 무너지고 만다.
이 때 중국인들이 내세웠던 구호가 멸만흥한(滅滿興漢),
그러니까 만주족이 세운 나라를 타도하고 한족의 나라를 건설하자는 얘기다.
결국 이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한족들은 만주와 중국이 혈연적으로
또 역사적으로도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중국은 수천년의 한족 중심의 사관을 버리고
다민족 통일국가론이라는 사관을 내세우고 있다.
즉 중국 역사는 한족이 이민족에 항쟁한 역사가 아니라
다양한 민족이 중국이라는 통일된 국가를 이루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는 만주와 우리 역사에서 동북공정이란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이민족인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 그리고 금나라와의 전쟁도
모두 중국 내부의 갈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여진족의 역사를 돌아본 것은 단순히 신라인의 후예가
금제국을 건설했다는 민족적 우월감을 확인하고자 함이 아니다.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벌이고 있는 역사전쟁
즉 동북공정이 얼마나 허황된 역사관인가를 말하고자 함이다.
중국 항저우의 명소인 악왕묘, 항우와 더불어
중국의 양대 충장으로 불리는 악비(岳飛, 1103~1141)의 사당이다.
- 악비 -
송 멸망 후 양자강 너머에 들어선 남송,
그러나 금나라 군의 공격은 매서웠고 남송은 위기에 빠진다.
이때 금군을 막아선 사람이 악비장군이었다.
악비는 악가군을 이끌고 곳곳에서 금군을 저지했다.
그래서 산은 흔들어도 악가군은 흔들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악비는 한족들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았다.
항저우의 송성가무쇼는 상해...와 함께 중국인들이 꼭 보고 싶어하는 양대 공연이다.
이 송성가무쇼의 하이라이트는 악비장군의 무용담 장면이다.
900년 가까이 악비는 중국의 민족지광으로 불리며 한족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런데 악비의 무덤엔 무덤보다 더 사람이 몰리는 곳이 있다.
그것은 발가벗겨져 무릎이 꿇린 진회 부부의 동상앞이다.
진회는 남송의 대신으로 부인과 함께 악비장군을 독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람객들은 이들에게 침을 뱉고 때리는 것을 악비의 한을 달랜다.
[인터뷰: 예 샤오타오, 관람객]
송나라 이후부터 중국인은 이름에 회(檜)자를 쓰지 않습니다.
진회(秦檜), 진회 그자를 이제 쓰지 않습니다.
그 글자를 쓰면 이름에 쓰면 진회가 생각나니까요.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악비에 대한 한족들의 사랑은 이처럼 크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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